우리나라의 3대 대첩(大捷) 귀주대첩

3대 대첩(大捷)의 두번째 귀주대첩

귀주대첩
[민족기록화_귀주대첩1975년, 이용환 작]

소개

우리나라 3대 대첩 살수대첩에 이어 두번째 “귀주대첩”에 대해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019년 3월 10일, 고려와 거란(요나라)가 귀주에서 맞붙은 ‘귀주대첩’. 이 전투는 고려군의 끈질긴 저항과 시기적절한 전략으로 요나라군을 물리친 화려한 승리였습니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이후, 고려는 북진 정책을 국시로 내세워 거란과 대립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거란은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해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것을 우려하며 고려를 세 번이나 침공했습니다.

1차 침공(서희의 담판)은 서희 장군이 의 소손녕과 담판을 통해 강동 6주의 땅을 획득하고 거란을 물러나게 하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2차 침공(양규 장군의 활약)에서는 강조의 변을 명분 삼아 처들어온 거란에게 고려의 수도 개경이 함락되는 아찔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후방에 교두보를 제대로 확보하지 않은 거란의 실책과 양규 장군을 비롯한 고려군의 끝임없는 게릴라 전으로 결국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차 침공(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거란의 2차 침공 당시 거란군의 회군 조건으로 내걸었던 고려 황제 현종의 친조와 송나라와의 외교 단절 조건 등을 어겼다는 명분으로 침공하게 됩니다. 이에 강감찬 장군을 비롯한 휘하 장수와 고려군들은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던 거란군의 기병을 상대로 야전에서 큰 승리를 거둬 거란의 고려 침공 야망을 완전히 꺾고 동북아의 힘의 균형을 통해 송, 거란, 고려가 거의 동등한 관계로 힘의 균형을 이뤄 향후 100여년간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국가의 존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고려의 영웅들의 헌신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귀주대첩의 전개

귀주대첩 요약

전쟁제3차 고려 vs 거란(요) 전쟁
일자1019년 3월10일
장소귀주(龜州, 현재의 평안북도 의주)
교전국고려거란(요나라)
결과고려 거란(요나라)
주요 인물강감찬(상원수)
강민첨(부원수)
김종현(병마판관)
박종검(판관)
유참(판관)
조원(시랑)
소배압(도통사)
소굴렬(부통사)
야율팔가(동경유수)
소한령(동평왕)
소요지(임아)
소해리(천운군상온, 요 성종의 사위) 전사
고청명(발해상온) 전사
아과달(요련장상온) 전사
작고(객성사) 전사
병력208,300여명80,000만~100,000여명
피해불명원정군 몰살
(약 1,000여명 생환)

배경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당시 고려 현종은 거란(요) 성종에게 친조와 송나라 관계 단절 등을 약속, 이에 거란군 회군
고려 현종이 친조와 송과의 외교 단절 약속을 지키지 않자, 거란은 강동 6주 반환을 빌미로 침공

진행

이에 고려는 문하시중 강감찬을 상원수로 임명하고, 대장군 강민첨을 원수로, 병마판관에 김종현을 임명해 20만 8천의 대군으로 소배압을 막도록 합니다.

귀주대첩 강감찬 영정
[강감찬 정부표준영정, 1974년 장우성 작]

고려군의 강민첨 대장군은 압록강 유역 흥화진의 삼교천(三橋川)에서 거란군과 맞서 싸워 승리했으나, 거란군은 고려 현종이 머물고 있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목표로 우회하여 계속 남하합니다. 하지만 자주에 있는 내구산에서 추격전을 벌인 강민첨 대장군의 기병1만4000천명에게 다시 한번 대패하게 되고, 대동강 마탄에서도 고려 장수 조원의 군사에 대패하면서 많은 군사를 잃게 됩니다.

거란군은 연이은 패배를 뒤로하고 기병의 장점인 빠른 기동력으로 고려 수도 개경 근처에 도착했지만, 이미 많은 병력을 잃었고, 설상가상으로 고려군의 청야 전술로 인해 식량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찰병으로 부터 개경의 방비가 탄탄하다는 보고를 받은 거란군은 더이상 전쟁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 합니다.

거란군은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기병 300명으로 고려군을 막게 하고 일사분란하게 후퇴를 진행했으나 용맹한 고려군의 공격으로 지속적인 피해를 입게 되고, 드디어 귀주 근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려군의 본진인 강감찬 장군의 부대와 만나게 됩니다.

결과

비록 거란군이 도망가는 형국이긴 했으나 기병 정예병들이었던 점과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악착같이 고려군에게 대항하는 거란군을 물리치는게 쉽지 않았습니다. 이때 개경에서 돕기 위해 올라온 김종현의 철기 기마부대가 거란군의 후진을 습격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앞서 거란군을 괴롭히던 강민첩 장군까지 가세하면서 고려군에게 승기가 넘어가고, 바람이 고려군에게 유리한 남풍이 불기 시작하고, 소나기까지 거란군을 더욱 혼란에 빠뜨려 우왕좌왕하게 하며, 강을 건너던 중 물에 빠져 죽은 거란군사가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귀주대첩
[보물 제588호, 강민첨 초상 (姜民瞻 肖像)]

거란군의 요련장(遼輦帳)의 상온(詳穩) 아과달(阿果達),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발해상온 고청명(高淸明), 천운군상온 해리(海里) 등과 같은 고위 장수들이 전사했으며, 1,000여명 만 살아 돌아간 전멸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패전에, 거란의 성종은 크게 노하여 소배압에게 ‘네가 적지에 너무 깊이 들어가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나를 만나려는가. 너의 낯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라고 책망하였다고 합니다.

맺음말

거란과 같은 유목민족(거란, 여진, 몽골, 선비, 돌궐 등…)들은 기마병 위주로 병력이 편성돼 있어 중원의 주력이었던 보병들은 이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북방 유목민족의 기병 1만명 이상이 모이면 무적으로 돌변해 중원 대륙과 한반도로 처들어와 많은 피해를 끼치기도 하고, 때로는 중원을 차지해 주인으로 군림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중국 한족 왕조나 고려, 조선은 북방 유목민족 세력을 막기 위해 서로 뭉치지 못하도록 부족간의 이간질이나 주변 민족을 끌어들이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을 일관되게 사용했습니다.

귀주 대첩이 지닌 가장 큰 의의는 이러한 거란의 대군을 괴멸시켜 거란(요) 성종으로 하여금 다시는 무력으로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야망을 버리게 한 동시에, 거란이 끈질기게 요구했던 고려 황제 친조(親朝)와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하지 않게 되었으며, 고려-거란간에 형식적인 조공 관계를 맺기는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고려-송-거란의 힘의 균형을 통해 향후 오랜기간 평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3대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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