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3대 대첩(大捷) 한산도 대첩

3대 대첩(大捷)의 세번째 한산도 대첩

한산도 대첩
[민족기록화, 한산도대첩]

소개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에 이어 우리나라 3대 대첩 중 하나인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산도 대첩은 우리나라 3대 대첩을 얘기할때도 포함이 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3대첩(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 한산도 대첩)에 포함이 되기도 하고, 이순신 장군의 3대첩(한산도 대첩, 명량대첩, 노량대첩)에 포함되기도 하는, 전쟁의 양상을 크게 뒤바꾼 매우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경남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한산도 대첩’은 일본 수군의 주력을 격파해 왜군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승리의 소식으로 용기를 심어 주었고, 이 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이미 상륙한 적군에게도 위협을 주어 불리했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지혜롭고 용감한 지휘 덕분에 완벽한 승리로 장식 ‘한산도 대첩’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산도 대첩 이순신 영정
[이순신 정부표준영정, 1973년 장우성 작]

한산도 대첩의 전개

한산도 대첩 요약

전쟁임진왜란(조선과 일본(왜)의 전쟁)
일자1592년 8월 14일
장소조선 견내량 한산도 앞 바다
교전국조선 수군일본(왜) 수군 주력
결과조선 일본(왜)
주요 인물이순신(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원균(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이순신(방답첨사)
권준(순천부사)
배흥립(흥양현감)
정운(녹도만호)
어영담(광양현감)
김완(사도첨사)
우치적(영등포만호)
한백록(지세포만호)
이영남
송희립
선거이
기효근(남해현령)
황세득(장흥부사)
제1진
와키자카 야스하루
와키자카 사효에(전사)
와타나베 시치에몬(전사)
마나베 사마노조(할복 자살)

제2진
구키 요시타카

제3진
가토 요시아키
병력판옥선 55척
(거북선 3척,판옥선 52척 포함)
전선 73척
(아타케부네 36척, 세키부네 24척, 고바야부네 13척)
피해전선파손없음.
3명 전사, 10여 명 부상
지휘관 전사, 부상
전선 47척 침몰
전선 12척 나포
마나베 사마노조 할복 자살

배경

1592년 7월 8일(선조 25년, 음력 5월 29일) 왜군을 섬멸하고자 두번째 출전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는 7월 18일(음력 6월 10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나, 반대로 육지에서는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 육군과 호응해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 ~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루어 서진하고 있었고, 계속해서 병력을 증강시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1진,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합세해 73척의 배가 모이게 됩니다.

이에 이순신은 8월 11일(음력 7월 5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전라좌수사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했고, 8월12일에는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세해 조선 수군의 전력은 55척이 되었습니다.

다음날(8월13일) 저녁, 조선의 연합 함대는 당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는데, 목동 김천손(金千孫)을 통해 일본의 다이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見乃梁: 거제)에 모여있다는 첩보를 전해 듣게 됩니다.

진행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 길이 약 4km,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는 데다, 암초가 많고, 해협이 좁아 바닥이 평저선이었던 조선 수군의 판옥선으로 전투를 벌이기에 불리한 곳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였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은 왜군이 전투에 패해 섬에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먼저 판옥선 5~6척으로 일본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격멸 한다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6척의 조선 함대가 일본 수군에게 도발하며 도망하자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뒤쫓아 한산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전 조선 함대가 배를 돌려 학익진을 펼치게 됩니다. 장수와 군사들은 훈련 받은대로 지·현자총통(地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해 왜선 47척을 불살라 격침시켰고 12척을 나포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뒤에서 관망 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나머지 전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해 조선 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전투 중 조선 수군 측에서는 3명의 전사자와 1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는 완전한 승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패해 한산도로 도망친 와키자카와 휘하의 병력 400여명은 13일 동안 미역을 먹으며 버티다가 뗏목으로 겨우 탈출 할 수 있었고, 마나베 사마노조는 자신의 배가 침몰하자 섬에서 할복하였다고 합니다.(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견내량파왜병장’)

결과

한산도 대첩은 일본 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해 수륙병진계획을 좌절 시켜 전쟁을 고착상태에 빠뜨리고, 조선 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육지에 있는 적군에게도 위협을 주어 불리했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구한말 고종 황제의 미국인 고문 호머 헐버트도 “한산도 대첩은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한산도 대첩 다음 날 벌어진 안골포(安骨浦) 해전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승리함으로써 한동안 일본 수군은 우리의 바다에 감히 한발짝도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날 이순신은 왼쪽 어깨에 조총을 맞아 부상을 입는 투혼으로, 조정으로 부터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이억기 ·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의 품계를 받았습니다.

맺음말

한산도 대첩이 있었던 당시에는 이순신 장군의 공을 인정하면서도 이 해전으로 어쩌면 왕이었던 선조의 목숨을 살려준 이순신을 의심하고, 이순신의 공을 원균에게 일부라도 돌리려는 어처구니 없는 시도가 있기도 했습니다.

한산도 대첩
[광화문 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살수대첩귀주대첩의 경우 충분한 대비와 중앙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와 긴밀한 연락을 통해 승리한 전쟁이었지만, 이순신 장군 휘하 수군들은 중앙 정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도움은 커녕 의심과 전공에 대한 인정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가운데 오직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한 마음으로 이순신 장군과 함께 판옥선 위에서 활과 포를 쏘고 노를 저으며 최선을 다해 싸우셨습니다. 우리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주시 선현들께 다시한번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3대 대첩

한산도 대첩, 홈으로 이동 합니다.

Leave a Comment